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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마이야조가 유럽의 사회와 경제에 미친 영향

후우마이야조가 유럽의 사회와 경제에 미친 영향
후우마이야조가 유럽의 사회와 경제에 미친 영향

후우마이야조가 유럽의 사회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마이야조는 원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두고 있었죠. 그러다가 우마이야조는 750년 압바스조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가 출신 중 한 명인 압드 알라흐만이 스페인 안달루스 지역으로 피신해서, 그곳에서 새롭게 두 번째 우마이야조를 창건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후우마이야 왕조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이슬람 문명 전파

이 후우마이야 왕조는 756년~1031년까지 바로 코르도바를 도읍으로 삼아 스페인 유럽 지역에서 이슬람 문명을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 우마이야조의 통치자들은 압바스조에 의해서 멸망당해서 먼 이국땅에서 살아야 된다는 설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러한 초창기 우마이야조의 망국의 한과 그다음에 원래 잃어버렸던 동방 지역에 있었던 우마이야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들은 후우마이야조를 창건했었던 압드 알 라흐마 1세가 지은 시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압드 알라흐만 1세는 항상 자신이 떠나온 동방의 고향 땅을 그리워했는데요. 그는 어느 날 궁정에 있는 야자수 한 그루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기도 했습니다. "루사파 궁 한가운데 보이는 야자수 한 그루, 본향에서 멀리 떨어져 서쪽 땅에 있네. 고향을 떠난 너의 나그네 신세, 우리 백성, 내 가족과 멀리 있는 나와 같구나. " 초창기 안달루스에서 세워진 후우마이야조의 통치자들은 항상 동방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또, 자신들을 패망시킨 압바스조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콤플렉스는 오히려 안달루스 땅에서 이슬람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극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압바스조에서 발전한 철학, 과학, 의학과 같은 학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안달루스가 압바스조보다 더 발전된 선진국이 되기를 원했고요. 또한 이들은 압바스조의 칼리파들이 즐겼던 고급 요리를 자신들도 즐길 수 있어야 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콤플렉스는 안달루스 지역에서 농업혁명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스페인에 알려지지 않은 작물을 수집하고 적응시키고 또 재배하는 농업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고요. 그러한 차원에서 그들은 '카나트'라고 불리는 지하수로를 파고 '사키아'라고 불리는 수차를 도입하여 물을 농지에 공급하는 대규모 관계 인프라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후우마이야조의 칼리파들은 현지에 적합한 농업서 편찬을 지원함으로써 당시 안달루스 지역에 알려지지 않았던 쌀, 사탕수수, 면화, 수박, 가지, 오렌지, 레몬, 망고 등과 같은 작물들을 아프리카, 인도, 페르시아,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작물들을 유럽인들이 먹기 시작한 것은 바로 후우마이야조의 공헌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안달루스 지역에서 농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정착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기후와 토양이 시리아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시리아 방식의 농경법과 작물 이식이 용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후우마이야조는 시리아 스타일의 건축 양식을 도입하여 도로, 다리, 모스크, 학교, 수도 시설 등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바로 수도 코르도바에 살았었던 주민들은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었고요. 또 잘 정비된 도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었던 코르도바는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는데요. 11세기 무렵 후우마이야조의 수도 코르도바는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전성기 시절 코르도바의 인구는 약 50만 명에 달했고요. 그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코르도바에는 약 300개의 목욕탕, 300개의 모스크, 50개의 병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코르도바의 도서관에는 약 40만 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었는데요. 이는 서유럽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후우마이야조의 사회 문화적 영향

후우마이야조는 스페인 안달루스 지역에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750년~1031년까지 다스리게 되는데요. 후우마이야조의 전성기는 10세기 초, 압드 알라흐만 3세 시대였습니다. 압드 알라흐만 3세는 북아프리카 지중해변 도시인 세우타와 탕헤르를 장악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고요. 그 여세를 몰아서 그는 929년에 스스로 칼리파임을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 압드 알라흐만 3세의 칼리파 선언은 역사적으로 이슬람 역사에서 보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가 있는데요.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칼리파라는 칭호는 전 세계 이슬람 공동체에서 단 한 명밖에 쓸 수 없는 칭호였습니다. 그 당시 칼리파라는 칭호를 썼던 국가는 바로 원래 다마스쿠스에 있었던 우마이야조를 멸망시킨 압바스 조였었죠. 그래서 후우마이야조가 칼리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압바스조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국력이 매우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후우마이야조는 칼리파라는 칭호를 92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이전에는 칼리파가 아니라 아미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아미르는 그냥 지방 군주 정도의 의미고요. 그래서 아미르는 보통 영어로 번역될 때는 아랍식 발음으로는 Amir고 영어식 발음으로는 Emir가 됩니다. 그래서 Amir가 다스리는 영토가 아랍어 발음으로는 이마라트 영어식 표현으로는 에미레이트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929년 칼리파를 선언하기 이전인 그 기간 동안에 후우마이야조는 바로 코르도바 아미르국 즉, Emirate of Cordoba로 불렸고요. 그다음에 929년 칼리파를 선언한 다음부터는 바로 칼리파국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Khalifate of Cordoba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후우마이야조 전성기는 압드 알라흐만 3세 이후 그의 아들인 알하캄 2세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알하캄 2세는 961년에 칼리파국으로 변화한 후우마이야조의 제2대 칼리파로 등극했습니다. 알하캄 2세는 즉위 직후 이베리아반도 북쪽에 있는 가톨릭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경제 및 사회 인프라를 정비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습니다. 특히 알하캄 2세는 스스로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있었던 호학 군주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메카 이슬람 세계의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출판된 서적까지도 거금을 들여 구입할 정도로 도서 수집에 매우 큰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 덕분에 후우마이아조 수도 코르도바도서관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문화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알하캄 2세 시기에는 새로운 궁전인 '미디나 알자흐라'가 코르도바 인근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원래 마디나 알자흐라는 그의 선친이었던 압드 알라흐만 3세 때 착공되었는데, 알하캄 2세가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이것을 마지막으로 완공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선친인 압드 알 라흐만 3세가 새로운 궁전인 '마디나 알자흐라'를 처음 짓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의 칼리파 선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후우마이야조가 새로운 칼리파 국가로서 위용을 갖추기 위해서는 바그다드에는 압바드조의 칼리파궁전과 견줄만한 대규모의 화려한 궁전이 바로 안달루스에도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의 취지에 걸맞게 '마디나 알자흐라'는 하나의 도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그 안에는 모스크, 관청 그리고 관료들의 숙소, 정원, 화폐 주조소, 책방, 목욕탕 등과 같은 많은 부대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후우마이야조의 몰락

알하캄 2세가 976년에 사망한 이후, 후우마이야조는 전성기가 끝나고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1세기 초 후우마이야조에서는 어리거나 무능한 칼리파가 권좌에 오르면서, 재상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되었고, 그 결과 국정이 혼란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세기 초 후우마이야조는 북쪽에 있는 가톨릭 국가들과 실효성 없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국력이 많이 소진되었습니다. 마침내 후우마이야조의 여러 귀족과 군벌들이 세력을 일으켜 내전이 벌어지게 되고 그 와중에 화려하게 지은 마디나 알 자흐라도 파괴되었고, 알하캄 2세가 지은 도서관도 약탈을 당했습니다. 결국 1031년 후우마이야조는 여러 군소 왕국으로 분열되어 멸망을 했습니다. 이것으로서 패망의 아픔을 딛고 756년 안달루스에서 새롭게 건설된 후우마이야조는 약 27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안달루스에 남아 있었던, 이슬람 세력은 점차 위기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