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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조의 건국 배경과 건축물

우마이야조의 건국 배경과 건축물
우마이야조의 건국 배경과 건축물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로 등장한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조 시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번 언급했다시피 칼리파 시대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의 역사는 크게 4단계 즉, 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이야조 시대, 압바스조 시대, 오스만 튀르크 시대로 나눠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은 바로 두 번째 등장한 칼리파 시대인 우마이야조 시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마이야조

우마이야조는 아랍 무슬림들이 세운 최초의 대제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마이야조는 661년~750년까지 이슬람 세계를 다스린 최초의 제국이었습니다. 우마이야조 시대에 이르러서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나고 이슬람 세계는 본격적인 제국의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마이야조 시대는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계속 영토가 확장되었고요, 그래서 코카서스, 트란스 옥 시아나, 인도의 신드 지역, 북아프리카에 있는 마그립 지역, 그리고 유럽의 스페인 안달루스 지역까지 병합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후에 등장한 압바스조를 이슬람 역사의 최고 황금기라고 여기지만 실제 영토의 크기만 보면 우마이야조 시대가 압바스조 시대 때 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고요, 우마이야조의 영토는 최대 1,500만 ㎢에 달했습니다. 우마이야조 초기에 주요 칼리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창기 우마이야조를 대표했었던 칼리파 가운데는 제1대 칼리 파인 무아위야 그리고 제2대 칼리 파인 야지드, 그리고 8C 초에 우마이야조를 통치했었던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 등과 같은 칼리파가 있는데요, 무아위야는 우마이야조를 창건한 우마이야조의 제1대 칼리파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시아파와 관련된 역사 내용을 공부하면서 무아위야가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는데요, 무아위야는 원래 시리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사람이었죠. 그렇지만 아라비아반도에서 알리라는 인물이 제4대 정통 칼리파에 오르게 되자 거기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리는 내분에 의해서 암살당하게 되고 그 덕분에 시리아 총독으로 있었던 무아위야는 우마이야조를 창건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아위야는 초창기 때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무아위야는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매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아랍 부족 전통의 칼리파 선출 방식을 폐지하고요, 그래서 과거 페르시아 제국이나 비잔티움 제국의 방식에 따라서 왕위 계승 체제를 마련합니다. 무아위야 시대에 이르러서 칼리파 제도는 과거의 전통적인 선출 방식에서 왕위 세습제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무아위야는 그 당시 중동 지역의 선진 문명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와 지중해에 있는 선진 제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왕정 체제를 받아들이고 다양한 행정, 군사 제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무아위야가 설립한 우마이야조는 수도를 다마스쿠스에 두었는데 이 지역은 원래 이 지역, 다마스쿠스와 시리아 지역은 이슬람 영토가 되기 전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위야 재위 시절에 상당히 빈번하게 우마이야조와 비잔티움 제국 간의 영토 분쟁이 많았는데 무아위야는 타고난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계속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요,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야지드는 우마이야조를 창건한 무아위야의 아들로서 우마이야조의 제2대 칼리파가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야지드에 대해서도 우리가 지난 시아파 수업 때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야지드는 2대 칼리파에 오르게 되었을 때 시아파의 창시자였던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이 여기에 대해서 반기를 들게 되죠. 그래서 야지드는 후세인과 그를 따르는 시아파 추종자를 680년 카르발라에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그런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바로 카르발라에서의 사건,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마이야가 다스렸던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시아파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요, 우마이야조는 더욱더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마이야조는 한 8C 초 무렵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우마이야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칼리파가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였습니다.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정복을 했고요, 또 다마스쿠스나 예루살렘의 우마이야 대사원과 같은 아주 커다란 규모의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 시절 때 이루어진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은 스페인 안달루스 지역의 정복이었습니다. 스페인 안달루스 지역의 정복은 후에 유럽 역사는 물론 이슬람 역사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마이야조 시대에 세워진 건축물

우마이야조 시대에 세워진 주요 건축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마이야조를 가장 대표하는 건축물로 예루살렘에 지어진 바위 돔 사원을 들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바위 돔 사원은 전성기를 이루었던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 이 칼리파의 아버지였던 압둘 알말리크 시대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바위 돔 사원은 691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사원은 우마이야조에서 등장한 본격적인 대규모의 이슬람 고유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건축물이 굳이 우마이야조의 수도가 아닌 예루살렘에 지어진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서 가장 중요한 성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역사에서 보면 초창기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릴 때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절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무함마드가 622년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헤지라 한 이후부터 예배 방향이 메카로 바뀐 것이고요, 그 이전에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예루살렘은 이슬람에서 메카, 메디나 다음으로 중요한 3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의 바위돔 사원을 보면 직경이 한 20M 정도쯤 되는 빈 공간을 팔각형 구조물로 에워싸고 있는 형식으로 지어져 있고요. 그 중앙에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습니다. 이슬람의 전승에 의하면 이 바위는 과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했었던 바로 그 바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원 안에 이와 같은 바위가 중앙에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사원 이름을 바위 돔 사원, 영어로는 Dome of Rock이라고 부르고요, 그렇지만 외관을 보면 중앙에 돔이 있고 그 돔에 황금이 덮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황금으로 도금한 돔이 외관에 있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바위 돔 사원이지만 외관을 보고 '황금돔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마이야조 시기에 세워진 또 다른 중요한 건축물로 수도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우마이야 대사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우마이야 대사원은 우마이야조의 전성기였던 알 왈리드 빈 압드 알말리크의 재위 기간인 705년부터 715년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본 예루살렘의 바위 돔 사원이나 다마스쿠스에 세워진 우마이야 대사원을 보면 둘 다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 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위 돔 사원 내부나 우마이야 대사원의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도 보면 상당히 비잔티움 지역에서 사용했던 모자이크와 유사한 것을 볼 수가 있고요.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최초의 본격적인 이슬람식 모스크가 비잔티움 제국 즉, 다시 말해서 기독교 교회 건축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은 이와 같이 영토를 뺏고 뺏기는 그런 관계가 있었지만, 동시에 건축과 예술 면에서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또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