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역사, 순니파, 시아파, 샤리아 개념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

리아앱 2022. 7. 28. 19:37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

시아파 국가인 이란에서 발생한 1979년 이슬람 혁명과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7세기 중반 페르시아 지역은 이슬람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501년 사파비 조가 등장하게 되면서 이란에서는 12 이맘 시아파가 국교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팔레비 왕조가 20세기 초반에 등장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12이맘 시아파 성직자들이 누려왔던 종교적인 권위가 무너지게 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팔레비 왕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7년 후인 192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슬람 세계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 국토가 분열이 되고 또, 식민지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행히 이란, 페르시아 지역은 유럽 열강에 의해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겨우 면했지만 당시 이란은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 속에서 외교적인 간섭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게 되고요, 1923년에 근대 터키 공화국이 설립이 됩니다. 그리고 근대 터키 공화국을 설립한 오늘날 터키의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 당시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과거 영광을 누렸던 오스만 제국이 왜 이렇게 서구 세력에 의해서 속절없이 무너졌는가? 거기에 대한 진단으로 과거의 이슬람 전통에 얽매이는 인습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빨리 이슬람의 전통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같이 근대화 정책을 펼쳐야 된다는 생각으로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이슬람 혁명의 배경

그리고 이러한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의 발전 모델은 이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당시 팔레비 왕조도 케말 아타튀르크의 발전 모델을 따라서 강력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 일환으로 팔레비 왕조는 1936년 여학생과 남학생이 대학교에 함께 입학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고요, 여성의 차도르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차도르라는 것은 이란에 살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온몸을 덮는 검은색의 전통 복장을 의미합니다. 차도르는 과거 이슬람의 전통을 상징하는 교시이고요, 차도르를 쓰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라는 것은 이란을 이제는 이슬람 국가가 아닌 서구식 세속주의 국가로 변모시켰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1961년 팔레비 왕조의 제2대 국왕이었던 무함마드 레자 샤(Muhammad Reza Sha)는 백색혁명을 추진합니다. 이 백색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사회의 전반적인 체제를 변화시키겠다는 의미인데요, 또, 백색혁명은 그 이외에도 이란을 서구와 같은 국가, 백인들의 국가처럼 변모시키겠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백색혁명을 추진하면서 팔레비 왕조는 토지 개혁 및 여성 참정권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그래서 토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과거, 종교 시설들이 갖고 있었던 많은 토지들을 국가가 몰수하게 되면서 종교인들의 경제적인 기득권이 상실됩니다. 또한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해 주면서 또, 이슬람 사회가 크게 변화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변화들은 그 당시 성직자 계층으로부터 커다란 반감을 사게 됩니다. 또한, 백색혁명을 추진하면서 팔레비 왕조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루어지는 그런 서구식 교육 체제를 도입하게 되고요, 이런 근대화된 학교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과거 종교적인 지식들은 이제 별로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서 또 과거 성직자들이 종교적인 지식인으로서 누려왔던 권위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백색혁명을 추진했었던 1960년대와 70년대, 바로 이 기간 동안에 이란은 석유를 수출하면서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게 됩니다. 경제 시스템이 석유 수출 중심으로 바뀌게 되면서 전통적인 지주와 상인 가문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많은 빈부의 격차들이 생기게 되면서 사회적인 불만 세력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백색혁명의 결과로 팔레비 왕조가 다스렸던 1970년대에 이란은 마치 유럽의 한 국가처럼 변모하게 되었는데요, 그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젊은 여성들이 입었던 의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란 여성들은 검은색의 획일적인 차도르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 당시 1970년대 이란은 중동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요, 유럽의 어느 젊은 여성들과 다름이 없는 개방된 형태의 그런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색혁명은 팔레비 왕조에 대한 반감이 사회 내부적으로 축적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습니다. 백색혁명으로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막대한 오일 달러는 대부분 팔레비 왕가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되고요, 그래서 팔레비 왕가가 소유한 기업 수만 해도 150개에 달할 정도로 왕가의 부패가 심각하게 됩니다. 백색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적인 변화, 그리고 급작스러운 경제성장으로 인한 빈부 격차, 그리고 왕가의 부패 등으로 인해서 성직자, 전통 상인, 학생들이 불만을 터트리게 되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 됩니다. 하지만 팔레비 왕조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오히려 '사바크'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조직해서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결국 팔레비 왕가와 성직자, 전통 상인, 학생들 간의 이런 대립이 극에 달해서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습니다.

이슬람 혁명

이슬람 혁명은 그 당시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였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벌어진 민중 봉기였고요, 이 이슬람 혁명으로 인해 1979년 2월 11일 팔레비 왕조는 붕괴되고 두 달 후인 4월 1일 이란에서는 이슬람 공화국이 선포됩니다. 오늘날 이란을 보면은 이란의 공식 명칭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이란은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슬람과 공화국이 결합된 형태의 매우 특수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은 당시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습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왕정 국가들은 이란에서 발생한 것과 유사한 혁명이 자기들 나라에서도 발생할지 모르다라는 그런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12 이맘 시아파를 국교로 하는 시아파라는 것을 강조를 하고 스스로 순니파 종주국임을 내세우면서 순니파 아랍 국가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중동의 헤게모니 싸움

정책은 바로 이란 시아파의 세력 확산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란은 이에 맞서서 아랍 국가들 가운데서 시아파 인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예멘 등에 접근하고 그 나라에 있는 시아파 세력을 규합하는 이른바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되었고요, 이런 이란의 시아파 벨트 정책에 맞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을 자신의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요, 또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예멘 내에서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에 맞서기 위해 순니파 세력을 지원하는 그런 맞불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우디아라비아 정책을 오늘날 순니파 벨트 정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오늘 역사에서 짚어 봤듯이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칼리파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또 이맘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와 관련된 교리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순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이런 칼리파와 같은 정치적인 논쟁도 아니고요, 교리적인 논쟁들도 아니고, 오늘날 순니-시아파의 갈등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중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패권 다툼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